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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작가 윤석남을 이야기해보자

워터칼라 서양화가 박윤숙 2022. 6. 11.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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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작가 윤석남을 분석해 보자.

1939년 만주에서 태어난 윤석남은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고 그녀의 나이 40 무렵 그림을 시작했다. 4년 정도 시인 박두진 선생의 문하에서 서예를 배웠고 그 후 그림으로 전향 이종무 선생에게서 잠시 사사하고는 이후 마음 가는 대로 표현하고 싶어 2년 정도 어머니와 주변의 아주머니들을 모델 삼아 그림에 몰두하며 훗날 페미니스트작가 윤석남으로 우뚝 설 자기 기량을 쌓기 시작했다. 오늘은 그녀의 운명적인 가정사, 첫 전시, 화업의 길, 유학, 허난설 헌, 윤두수와의 조우 그리고 작품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1. 작가 윤석남이 페미니스트작가가 된 배경, 가정사.

1939년 만주에서 유명 소설가이자, 극작가, 영화감독인 아버지 윤백남 씨와 초등학교만 겨우 나왔으나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카라마조프의 형제들]등을 즐겨 읽으시던 어머니 원정숙 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원정숙 씨는 당시 윤백남 씨의 팬이었는데 우연히 윤백남 씨가 원정숙 씨의 집에 하숙을 하게 되었고, 이후 원정숙 씨는 우상이던 27살이나 많은 윤백남 씨의 첩이 되었으며 슬하에 6남매를 두게 된다. 어머니의 당당하고 낙천적이 성향은 자신들을 자존감 있는 사람으로 성장케 했다, 첩의 자식이란 것이 자존감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페미니스트 작가가 될 배경이 되지 않았을까?

2. 페미니스트작가 윤석남의 운명적인 첫 전시.

1982년 중견작가인 친구와 아르코 미술관에서 2인 전을 기획했다가 친구의 사정으로 각각 개인전을 갖게 되는 행운을 맞는다. 이 첫 전시를 계기로 많은 화가들과 교류하게 되었으며, 여러 단체에도 초대받게 된다. 당시 추상 일변도이던 화단에서 화단에 익숙지 않은 스타일 때문에 주목받게 되며, 서서히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3. 페미니스트작가 윤석남 뉴욕 유학길.

1983년 남편의 권유로 뉴욕의 플랫 인스티 투드 그래픽센터의 아트 스튜던트 리그에서 1년 동안 그림 공부를 하게 되면서 1년 동안 뉴욕의 화랑을 섭렵하고 열심히 화풍과 그림의 동향에 대하여 열심히 발이 닳도록 발품 팔며 공부했다. 페미니스트작가 윤석남은 그림은 손으로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발로 배우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하며 뉴욕에서의 유학생활을 회고한다.

4. 페미니스트작가 윤석남의 화업의 길.

초등학교 3학년부터 화가의 꿈을 꾸었으나 고등학교 재학 시절 급작스런 아버님의 병환으로 재산을 남겨주지 못한 채 돌아가시게 된다. 이로 인한 경제적 궁핍으로 꿈을 이루지 못하다가 마흔 살 즈음 남편의 사업이 성공하면서 화가로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이 무렵 나는 누구인가? 나의 존재는 무엇인가? 그래서 뭐라도 해야 했다. 갑작스러운 남편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6남매의 생계를 꿋꿋이 지켜낸 어머니를 그리기 시작한 지 2년 만에 첫 개인전을 열게 된 것이 화업의 시작이며 페미니스트작가 윤석남의 탄생이라 하겠다.

5. 페미니스트작가 윤석남 허난설헌과의 조우, 평면 탈출.

우연히 허난설헌을 찾은 윤석남은 조그만 나뭇조각을 보고 그것이 허난설헌이라 여기며 마치 그녀에 빙의된 모습으로 그녀와의 연결을 꿈꾸며, 30년 묵은 너와나무의 묵은 결을 이용하여 이렇게 평면에서 탈출을 시도하게 된다. 100여 년 전 그 시대 족보엔 여자가 없었다. 그 시대의 여자는 사람이 아니었다. 저 근엄하게 앉아있는 마나님도 실제의 삶은 목매달려 있는 여인처럼 슬프고 아픈 삶이었다. 촛불은 그렇게 삶에 그녀 자신을 불태워 소멸시킨 그녀들의 삶을, 느낌을 표현하게 되며 페미니스트작가로 거듭나는 계기가 된다.

6. 페미니스트작가 윤석남의 [핑크 룸] 시대.

핑크 룸은 40대 가정주부 시절 공주 같은 안락함은 있었으나 늘 발이 땅에 닿아 있지 않은 공주에 붕 떠 있는 삶이었다. 발이 닿지 않는 땅. 끝없이 펼쳐진 공간을 칠하지 않은 채 그냥 놔두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비로소 해방을 느꼈다. 평면의 답답함에서 탈출을 시도 설치를 했으나 설치가 주는 공간의 제한에 역시 답답함은 마찬가지였고 오히려 평면으로 돌아와 해방이 되었다. 일기를 쓰듯 그려낸 서툰 작업에 몸을 움츠렸는데 오히려 대중의 반응은 좋았다. 완벽한 어려움보다 서툰 미학이 그들을 공감하게  했다. 그렇게 그려내려니 드로잉 실력이 모자람을 느껴 2년 동안 드로잉 공부에 매달리기도 했다.

 

모자람을 느껴 모든 걸 내려놓고 드로잉 공부를 한다는 쉽지 않은 과정을 해내며 페미니스트작가로 우뚝 선 윤석남 작가. 국립박물관을 드나들며 [윤두서]와의 만남을 계기로 초상화에 입문한다. 그 수많은 초상화 중에 여성의 초상화는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요즘은 독립운동사를 뒤지고 역사공부를 하며 위대한 여성들을 찾아내어 그녀들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페미니스트작가 윤석남. 어려운 과정을 이겨내며 명실공히 페미니스트작가 윤석남으로 우뚝 자리매김한 윤석남 작가에게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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