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

아방가르드 김구림

워터칼라 서양화가 박윤숙 2024. 2. 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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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방가르드의 얼굴 김구림

 

 

김구림 (1936~)  1958 년 대구 공보관화랑에서 개인전을 하며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전통적인 회화작업에서 출발했으나 1969 년을 기점으로 그는 한국 아방가르드 미술의 전위가 되었다. 그해 그는 앵글 362를 연출했고, 보디페인팅을 발표했으며, 최초의 실험영화 1/24초의 의미와 최초의 메일아트 매스미디어의 유물을 발표했다. 1970 년에 결성한 제4 집단의 리더가 되었고 아방가르드협회 회원이었으며, 현재까지 쉬지 않고 실험적인 작업들을 보여주고 있다. 오늘은 그의 발자취를 들여다보자.

 

김구림 전위의 꽃

 

1969 년, 34 살의 청년 김구림은 전위의 꽃을 피운다. 1969 년의 현실은 6․25 한국전쟁 이후의 파괴된 참된 현실이 아니었다.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좌우 이데올로기 전쟁, 피폐된 현실, 4.19 혁명, 5.16 군사쿠데타, 그 현실은 비현실과 초현실로 들끓었고 어지러웠다. 군사정권은 식민과 이데올로기와 전쟁과 가난, 민주주의와 쿠데타를 거쳐 급진적인 근대화를 맞는다. 근대화의 풍경은 도시화, 산업화되어 가고, 그리운 풍경들은 그의 가슴속에 살아 있다.

 

최초의 전위적인 실험영화

 

김구림의 실험영화 1/24초의 의미는 그런 1969 년의 현실을 1/24초로 재현한다. 1초에 24 컷이 돌아야 현실의 시간이 된다. 더 빠르거나 늦으면 영화는 비현실이 되거나 초현실이 된다. 그의 영화는 달리는 차에서 본 고가도로 난간과 60 개의 짧은 플래시 컷 (Flash Cut), 샤워 장면, 하품하는 남자, 피어오르는 연기를 반복한다. 난간의 위아래로 스미고 튕긴 서울의 풍경이 빠른 도시화의 민낯이라면, 샤워 장면과 남자, 연기는 도시를 둥지 삼아 시곗바늘처럼 살아가는 현대인의 일상이다.

 

김구림은 사운드 없는 16mm 필름으로만 엮어서 그 시대를 몽타주 했다. 이야기 전개 없이, 모든 장면이 서사이면서 동시에 파편화이고, 주연도 조연도 없이 현실만 존재하는 이 영화는 그래서 한국 최초의 전위적인 실험영화로 기록되고 있다.

 

전위 예술가의 유쾌한 해프닝이 던진 희망

 

미술 음악 연극 영화를 종횡무진하고자 했던 김구림의 전위적 행보는 1970 년에 본격 가동되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시대를 흔들었던 사건과 사고는 주간지의 단골 메뉴인데, 당시 주간경향 5 월 27 일자를 살피면, 대낮 번화가에서- 발랄한 청춘들, 세 전위예술가들의 이색적 해프닝이라는 머리기사가 눈에 띈다. 그리고 카바마인가루와 찢어진 콘돔, 그리고 아무렇게나 쓰여진 숫자를 담은 흰색 봉투를 행인들에게 뿌리며, 혹은 육교 위에 오색 고무풍선을 띄우며, 이것이 무한예술의 확대라고 부르짖는 이색 전위 예술인들이 등장했다는 기사가 이어진다.

 

이 해프닝의 목적은 미각을 중심으로 한 인간들의 정신 문제와 관념의 흐름을 다뤄보았다는 것. 겉도는 현실에 밀려 이리저리 쏠리고 뒤흔들리는 사람들의 마음에 희망의 마음기둥을 심고자 했던 것이 그의 본심이었다. 약보다 의사의 따듯한 말이 병을 낫게 하듯 김구림의 말들은 황당한 구라가 아닌 유쾌한 해프닝의 희망을 불어넣기 위해 작성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 작품은 김차섭과 함께 기획한 매스미디어의 유물(1969)과 함께 최초의 메일아트로 기록된다.

 

캔버스가 아닌 대지가 어떻게 미술이 될까

 

1970 년 4 월 11 일 오전 11 시, 한양대학교에서 한강의 뚝섬으로 이어진 살곶이 다리 옆 강변 둑에서 검은 양복을 차려입은 한 사내가 경사진 둑에 빗금을 치고 있다. 빗살무늬 토기 문양으로 사선을 그은 뒤 그는 면의 한쪽을 건너뛰며 불을 지르기 시작했다. 위아래 경사면 폭 22m 길이 약 100m의 둑이 쥐불놀이에 그슬린 것처럼 활활 타 올랐다. 타지 않은 면과 타오른 면이 삼각뿔을 형성하며 거대한 무늬가 되었다. 현상이 기획되는 현장은 밭둑. 논둑 태우기의 세시 풍속 따위로 가볍게 인식되었으나, 그 태우기의 의식은 원래 논밭에 벌레가 성한 것을 막고자 했던 것이 바탕이다. 미학의 쟁점은 첫 대지미술적 사건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벌레를 태우고 그 태운 것의 힘이 새싹을 밀어내는 흔적에 있다.

 

뒤늦게 모여든 사람들은 캔버스가 아닌 대지가 어떻게 미술이 되는지 구경했다. 그의 작품은 여러 가지 면에서 새로웠다. 대지가 하나의 예술작품이 될 수 있다는 대지미술의 개념을 완벽히 제시했기 때문이다. 영국의 대표적인 대지미술가인 리처드 롱도 인도에서 이와 유사한 불태우기 작업을 시도한 바 있으나 그것은 최근에 와서다. 탄 곳과 타지 않은 곳은 그해 5 월이 되자 새싹을 틔웠고 탄 곳의 흔적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여름이 되고 가을이 될 때까지 잔디는 웃자랐고 그 자란 싹의 키와 색을 구분하기란 쉽지 않았다.

 

 

음과 양 98 - S 181 Arcylic on canvas 137x183cm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세상의 이면을 들쑤시다

 

그는 모든 것이 음양(陰陽)의 이치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눈앞의 현상과 눈 밖의 흔적이 음양의 두 이치와 다르지 않고 현실과 비현실 또한 마찬가지, 그의 첫 작품으로 기록되는 1958 년의 회화 작품 중에 moon, mountain, lake와 moon night의 두 작품은, 표현이 음양을 따랐다. 산과 달, 집 모습이 흑과 백, 가득함과 비움으로 그려진 것으로 보아 그의 출발이 음양에서 비롯된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음과 양에서 현상과 흔적으로 발전되고 다시 음양으로 회귀하는 그의 미학개념의 순환은 우주만물의 생겨남과 없어지는 자연이치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붉고 큰 물통 세 개에 크기가 다른 얼음을 넣고 얼음크기의 트레싱 종이를 올려놓은 뒤, 얼음이 녹아 증발해 과는 과정을 보여주었던 1970 년의 현상에서 흔적으로는 1974 년 작품 삽과 빗자루, 1975 년의 철의자, 1979 년의 의자로 이어지면서 작품은 심화되었고, 개념은 명쾌해졌다. 얼음 작품이 무위(無爲)의 흔적이라면 오브제 작품들은 최대한의 인위(人爲)로 시간성을 최소화시키는 작업들이었다. 그의 생각은 쉬지 않고 계속됐다. 개념적 사진작업과 캔버스에 실 바느질한 작업들, 보디페인팅, 길거리패션쇼, 연극무대 의상 조명, 비디오 아트 등의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작업들은 아방가르드의 전형을 제시한다.

 

국립극장에서 개최한 제1회 서울국제현대음악제에 참여하기도 했는데, 그는 슈토크하우젠의 전자음악이 라이트의 하모니 속에서 울려 퍼질 때 무대 위에서 한 사내가 빨래 방망이로 한 사내를 때리는 해프닝을 펼쳤고 정찬승과 차명희를 출연시켜 백남준의 콤퍼지션을 연출하기도 했다.

 

1970 년 제4집단 결성

 

1970 년 6 월 20 일, 그는 동료들과 제4 집단을 결성했다. 무체사상(無體思想)을 미학개념으로 한 이 집단의 리더는 김구림이었다. 제4 집단에는 화가, 의상디자이너, 마임니스트, 기자, 시나리오 작가, 음악가, 스님 등 13인이 참여했다. 참으로 기발하고 기이한 집단의 탄생이었다. 1 년여 동안 지속된 이 집단의 활동을 통해 그는 그의 예술세계의 밑개념을 완성할 수 있었고 현재까지 그의 전위정신은 쉬지 않는다. 고정관념으로부터 일탈하여 세계의 이면을 들쑤시고 싶어 하는 이 아방가르디스트의 얼굴에는 그래서 사유하는 기계와 흰 날개가 따라붙는다.

 

김구림 미학의 알고리즘

 

2012 년 봄부터 시작된 서울시립미술관의 SeMA 삼색전의 세 가지 색은 청년(Blue), 중진(Gold), 원로(Green)다. 2011 년에 청년과 중진을 다뤘고 2012 년에 첫 원로 전을 기획했다. 서울시립미술관은 첫 원로작가를 누구로 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SeMA 기획의 첫 대상자가 된다는 것은, 동시대 최전선에서 활동하는 청년작가나 중진과 달리 한 예술가의 예술적 성과를 학술적으로, 비평적으로 성찰하는 장이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미술관이나 작가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SeMA가 내린 결론은 김구림이었다.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은 그의 1960~70 년대 작업들은 당시 한국 현대미술을 뒤흔든 미학적 사건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아방가르디스트 김구림

 

김구림은 1960 년대 중반부터 실험적인 작품을 발표했으나 1970 년에 창립한 제4 집단 리더로 기성미술계의 아성과 권위를 장례 치르며 등장, 평생을 세상과 불협(不協)하는 불굴의 미술가가 되었다. 타협하지 않는 것과 불협의 의미는 같지 않다. 예술가로서 김구림의 불협은 앞서 언급했듯이 기성미술계의 아성과 권위와 타협하지 않는 정신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그의 불협정신은 역설적이게도 전위와 아방가르드의 상징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스스로 이루어진 세계를 소격(estrangement effect) 시킴으로써 불협의 미학을 완성해 나간 낯선 세계의 이방인이다. 그래서 그의 작업들에서 최초의 타이틀을 자주 찾아볼 수 있다.

 

군사독재정권의 강압적 반공정책에 따른 전위정신의 실종과 미학적 순응주의. 그리고 대한민국 미술대전이 주도했던 아카데미즘에 저항하는 해프닝, 설치미술, 메일아트, 보디페인팅, 대지미술, 개념미술, 실험영화 등을 선보였다. 특정 장르에 예속되지 않은 그의 실천적인 미술활동은 하나하나가 반향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것들이었다.

 

 

이번 전시에 그런 작품들을 재현하거나 재연, 재제작하여 출품됨으로써 비어있는 알고리즘의 영토가 완성되었다. 시대로는 1960년대 중후반부터 70년대 중후반까지 약 10년에 해당하고, 한국 정치․사회사로는 제3공화국의 반공애국정책, 경제개발정책, 새마을운동에서 유신헌법에 따른 유신정권의 탄생까지이며, 미술사로는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의 기념조각 건립과 민족기록화 사업의 본격 전개 및 단색조 화풍의 등장 시기와 맞물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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